• [이윤정의 판&펀] 뉴진스 사태, 팬들은 기다려줄까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 ‘아일릿은 뉴진스의 카피다.’ 며칠 새 대중문화계에서 가장 유명해진 발표문의 이 문구는 법적으로는 별 효력이 없는 말이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는 아일릿이 헤어, 메이크업, 의상, 안무, 사진, 영상, 행사 출연 등 연예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뉴진스를 카피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민희진 풍’ 혹은 ‘민희진 류’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자신의 창작 ‘콘셉트’를 베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작권법에서 보호받는 대상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이다. 구체적인 결과물이 아니고 전반적인 ‘이미지’나 ‘스타일’로는 표절의 법적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  「 팬덤은 논리적이지 않고 신비 팬심이 창작자 의도보다 중요 뉴진스 활동 중단될까 우려 커 」    판앤펀 팬들은 각자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은 법에 맞춰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산업이 가장 독특해지는 지점은 인간의 ‘매력’이라는 상품에 예측할 수 없는 ‘팬덤’이라는 신비한 마음의 영역이 대응한다는 점이다. 물적인 상품들과는 달리 대중문화 히트의 규칙이나 비밀이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어느 곳에서 스타의 매력을 찾아낼지 모른다. 팬덤은 논리적이지 않고 일관성이 있지도 않다. 예측과 기대는 종종 어긋난다. 클리셰로 범벅된 드라마, 스캔들로 얼룩진 스타, 가창력 논란을 달고 다니는 가수에게도 매료되는 이유다. 누구의 아류 혹은 카피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매력을 느껴버린 팬덤은 말릴 수가 없다.   아일릿은 논란 속에서도 데뷔곡 ‘Magnetic’으로 빌보드 핫 100에 오르는 새 역사를 썼다. K팝과 한껏 사랑에 빠져버린 세계적 팬들의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뉴진스로 K팝의 물꼬를 확실히 다른 방향으로 전환한 민희진 대표는 하이브 방시혁 대표의 창작 윤리나 리더십을 제작자 입장에서 탓하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이 뉴진스와 아일릿의 관계를 K팝의 새 트렌드 혹은 장르의 전형적인 탄생과정에서 등장하는 ‘파이오니어’와 ‘팔로워’의 관계로 이해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대중문화는 결국 창작자의 의도가 아니라 팬들의 수용 여부가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팔로워로서도 결국 자신만의 독창적인 매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자기복제만 거듭된다면 팬덤은 또 한순간 싸늘하게 식을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제 겨우 자신의 매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두 그룹을 놓고 훗날의 결과를 예측하긴 이르다.   제작자로서 자신의 독창성을 주장하려던 민 대표의 발언은 팬들의 마음을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일릿이 뉴진스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말을 계기로, 모기업과 산하 레이블 제작자가 벌이는 싸움을 경영권 탈취 논란 등 업계의 분쟁으로 지켜보려던 팬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뉴진스만의 매력을 팬심으로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이 그들의 스타일을 낱낱이 살피며 ‘카피’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스타의 매력을 제작자 스스로 깎을 여지를 줘버린 것이다. 또 “뉴진스의 멤버들과도 논의를 거쳤다”는 발언에 팬들로서는 피프티피프티의 어두운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싸움이 큰 논란 뒤에 결국 대중들이 원하는 정의를 되찾은 방향으로 갔을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뉴진스에 앞서 엄청난 새 역사를 썼던 여성 그룹의 놀라운 성취와 미래 가능성은 한 순간 정지되어 버렸다. 멤버들과 가족들이 싸움에 끼어든 순간 그룹은 활동을 중단하고 평생 가수들의 꿈이라고 할만한 무대와 기회들을 박차버렸다.   이 그룹이 앞으로 다른 인원으로 채워 활동하겠다고 하지만 딱 한 곡 히트시키고 사라졌던 그들이 낯선 얼굴로 등장할 때 팬들의 마음이 움직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뉴진스 팬들이 하이브의 손을 들어주는 내용으로 시위를 벌인 것은 혹시라도 민 대표 측과 가족들이 함께 긴 법적 분쟁을 벌이게 될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그 경우 뉴진스의 오랜 활동 중단은 불가피하다. 팬들에게는 가장 슬픈 결과다.   이 산업에 대체 불가능한 존재란 없다. 아티스트도 프로듀서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도.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스타와 실력자들이 전 세계에서 성장하고 있다. 한 발만 삐끗해도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 한때 반짝했다 사라지는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다. 지금은 새로운 ‘콘셉트’보다, 대세를 거스르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보다 팬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아티스트의 꾸준한 활동과 성장이다.   이렇게 전 세계의 팬들을 들썩이게 하는 큰 싸움이 벌어지는 와중에 5월부터 뉴진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원래 계획대로 씩씩하게 활동할 수 있을까. 싸움은 언젠가 어떻게든 끝나겠지만, 팬들의 마음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올까.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팬들은 가시방석이다. 비즈니스는 모르겠고, 어서 나에게 예전처럼 노래를 들려줘. 팬들의 마음은 이렇지 않을까.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2024.04.26 00:16

  • [이윤정의 판&펀] 몸에 대한 편견 바꾸기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TV를 보며 몸에 대한 나의 편견을 바꾸게 된 계기가 몇 번 있다. 맨 처음은 김연아 선수의 피겨스케이팅이었다. 천상의 연기를 펼치는 그의 완벽한 경기를 보고 나면 ‘다리 짧은’ 동양인 혹은 서양인의 이상적인 팔등신 비율 같은 고정관념은 깨끗이 사라졌다. 아니, 그렇게 빠른 시간 안에 뛰어올랐다가 미끄러운 빙판에 안전하게 내려앉으려면 백인의 긴 다리는 좀 거추장스러운 게 아닐까 하는 ‘역 편견’이 생길 정도였다.     ■  「 육체엔 각자 시간과 노력 새겨져 몸 만들며 한계 극복해 가기도 도전할 때 새로운 정체성 생겨 」    판앤펀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는 ‘섹시함’이란 단어에 대한 편견을 지워주었다. 자신의 몸으로 그렇게 당당하고 진지하게 아름다움을 뿜어낼 수 있는 여성들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러자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쓸어올리는 몸짓에 어쩐지 가져야만 할 것 같았던 민망함이 갑자기 촌스럽게 느껴졌다. 흉내 내기에는 너무 둔한 중년의 몸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엉성하게 따라 해보기도 했다. ‘골때리는 그녀들’은 정성을 다하면 공과 함께 굴러다니던 여자들도 대포알 슛을 날리고 빌드업 축구를 해내는 선수가 될 수 있다는 몸치의 무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죽도록 이기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몸짓은 월드컵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피지컬:100’(사진)은 ‘초콜릿 복근’이나 겨우 떠올렸던 ‘패션’으로서의 근육과 몸에 대한 편견에 KO 펀치를 제대로 날려버렸다. 완벽한 피지컬을 찾는다는 모토 아래 경연을 펼치는 이 쇼프로그램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지점은 몸싸움에 종종 등장하는 슬로우모션이다. 땀에 젖거나 웅덩이 물에 젖어 반짝반짝 빛나는 탄탄한 몸들이 강렬한 승부욕으로 맞부딪힐 때 그것은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에서 맹수들이 포효하며 혈투를 벌이는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이때 클로즈업한 카메라가 포착해내는 일그러진 표정과 섬세한 여러 겹의 근육들. 그때 보는 이들은 그 한겹한겹의 근육이 만들어지는 동안 그들이 쌓아 올렸을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자연스럽게 덧대어 생각하게 된다. 힘자랑이라는 전경 뒤에 펼쳐진 보이지 않는 시간의 배경을 떠올리게 하는 화려한 육체의 스펙터클은 경의를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참가자들이 서로의 신체적 능력에 감탄하며 응원하는 모습은 ‘빌런’을 억지로 만들지 않는 세련된 연출에 있기도 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서로의 육체에 새겨진 시간의 의미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네트 베닝 서양의 언론들은 특히 이 프로에서 ‘아시아인들의 몸에 대한 자신감’이 중심에 놓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건장한 남성들의 몸을 다룬 그들의 리얼리티 쇼나 영화 드라마들이 전형적인 백인의 근육을 이상적인 형태로 놓고, 체구가 작은 아시아인들은 수동적이고 약한 모습으로 그렸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통쾌한 반전이다. 고정관념을 깨치는 동양인의 아름답고 강인한 몸 뿐 아니라 여기서는 근육질이나 뚱뚱한 몸, 혹은 날씬하지만 탄탄한 몸, 심지어 여성들까지 힘의 다양한 원천이 동등하게 경쟁한다. 팀을 이룬 참가자들이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엄청난 힘과 근육뿐 아니라 균형감각과 지성과 헌신이 필요함을 일깨워 주는 모습도 보기 좋다. 시즌1의 우승자 우진용이 큰 체격을 가진 사람들에 맞서 끈질긴 인내로 승리를 따내는 모습이 이 스토리의 결말을 아름답게 증명했다. 이 프로그램은 힘자랑과 육체미가 떠올릴 법한 마초적 경쟁과 허세 같은 손쉬운 연관어들 대신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는 몸을 향한 의지를 진지하게 보여줬다. 그리고 그걸 보던 나의 ‘몸뚱이’도 조금은 아름답게 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난생 처음 PT를 끊게 되었다.   그러나 중년의 몸은 쉽사리 희망을 주지 않는다. 아름다운 몸매는 감탄과 경의의 대상으로 즐기기만 하자는 좌절 모드에 접어들 때쯤, 넷플릭스 영화 ‘나이애드의 다섯 번째 파도’를 보게 됐다.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아네트 베닝이 올라있어서 그 예쁜 얼굴이 얼마나 변했을까 궁금해서였다. 영화는 60대 나이에 쿠바에서 플로리다까지 바다 수영으로 횡단한 실존 인물 나이애드의 이야기를 다뤘다. 나이 든 사람의 늙지 않는 도전 이야기는 이미 흔하다. 하지만 눈에 띄는 건 65세의 아네트 베닝이었다. 그 나이에 처진 몸매가 드러난 수영복을 입고 화장을 하지 않은 모습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었다. 더구나 바닷속 해파리를 피하기 위해 얼굴에 고무 마스크를 덮어쓰고 횡단을 끝낸 배우의 얼굴은 퉁퉁 부어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때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현명하게 늙어가는 몸이란 미추의 잣대로는 의미가 없다는 것. 그 육체에 ‘도전’과 같은 새로운 임무를 부여할 때 그 몸과 얼굴은 아예 새로운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다 횡단은커녕 50m도 겨우 헤엄치는 수준이지만 일단 수영복 몸매 부끄러워 말고 내 몸과 마음에 어떤 새로운 임무를 던져줄지 고민해보기로 했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2024.03.22 00:24

  • [이윤정의 판&펀] 영화·드라마 제작사 A24의 성공 비결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A24가 또 해냈다. 눈 밝은 어떤 팬들은 며칠 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의 수상에 이렇게 환호했을지도 모른다. 한국계 스티븐 연(사진 왼쪽)과 중국·베트남계 여배우 엘리 웡(오른쪽)은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이 부문 남녀 주연상을 받아 현지 언론의 말처럼 ‘새 역사’를 썼다.   영화 드라마 제작사 A24가 쓰고 있는 새 역사는 눈부시다. 창사 10년을 살짝 넘긴 뉴욕의 이 제작사는 지난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작품상을 비롯, 7개 부문을 받고 ‘더 웨일’로도 2개를 더했다. 독립영화사가 9개 부문을 싹쓸이한 것 역시 사상 최초며 주연 미셸 여도 아시아계 배우 최초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를 받은 윤여정의 영화 ‘미나리’도 A24의 영화다. 독립 영화배급으로 시작해 2016년 처음 제작한 영화 ‘문라이트’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아낸 것 역시 흔치 않은 일이다.     ■  「 ‘성난 사람들’ ‘문라이트’ 등 제작 대중문화 트렌드·시대정신 파악 쿨하고 힙한 느낌 주는 데 성공 」    판앤펀 주목할 점은 이 제작사를 향한 열광적인 팬덤이다. 이른바 ‘아트하우스 필름’이나 독립영화에 대한 열광은 오랫동안 특정 작품이나 감독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A24는 제작사 자체가 팬들의 추앙 대상이 됐다. 엔터테인먼트 전문지 ‘벌쳐’는 재작년 ‘A24 컬트’라는 특집 기사를 썼다. 팬들이 입을 모아 “이 회사의 영화라면 무엇이든 보겠다”고 자발적으로 외치며 회사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컬트 제작사’가 된 것이다.   A24의 성공 스토리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할리우드의 거대 스튜디오들이 수퍼히어로 거대 액션 영화 시리즈로 상상력의 빈곤을 드러낼 때쯤 뉴욕의 영화사 출신 셋이 모여 만든 이 회사는 예술적인 독립영화 배급으로 틈새시장을 열었다. 특이한 점은 예술영화 마니아라면 연상될 만한 어두침침한 색채를 싹 벗어던지고 뭔가 쿨하고 힙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던져주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언론들은 이 제작사를 ‘부티크 호텔’ 같은 ‘부티크 제작사’로 부른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TV 광고를 완전히 버리고 95%를 온라인 마케팅에 집중하며, 데이터 분석과 잠재적 구매자 타겟팅을 통해 마니아들이 발견의 즐거움을 느끼며 공유하게 하는 스마트한 마케팅이 있다. 소셜 미디어 시장이 텍스트에서 영상 위주로 중심 이동하던 2010년대 초반, 팬들은 이들이 영화 속에서 잘라내 뿌린 흥미로운 ‘밈’ 혹은 ‘짤’들을 퍼날랐다. ‘해리포터’의 주연인 대니얼 래드클리프가 시체로 나온 영화의 경우, 시체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게 하기도 했다. 또 영화사 자체 멤버십 회원을 모집하고 영화마다 엄청난 수의 관련 상품들을 판매하고 제작사 계간지를 발매한다. 이 제작사의 인스타그램은 220만 명 이상의 팔로어를 가지고 있으며 레딧에 13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가지고 있다. 제작사의 티셔츠와 영화 관련 상품들은 나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은 결코 영리한 마케팅의 덕만이 아니다. 2016년 제작을 시작한 이래 이 제작사는 “재능있는 사람들이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하겠다”며 오랜만에 ‘작가’ 영화가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를 팬들에게 실감 나게 보여주고 있다. 배리 젠킨스(문라이트)나 대런 애러노프스키(더웨일) 등 감독들은 이 영화사가 감독에게 작품에 관한 한 전적인 신뢰를 부여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옹호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주도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시대정신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춘 제작사”라는 것이다. 놀라운 공포 영화 ‘미드소마’나 ‘유전’ 등으로 공포영화 팬들에게 뭔가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실감케 한 배경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최초의 아시아계, 최초의 한국인계 같은 역사적인 수상 실적을 내는 일 역시 세심하게 영화 산업과 관객의 수요 변화를 읽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미나리’나 ‘성난 사람들’은 그저 미국 영화의 배경화면으로만 등장했던 한인 교포사회의 디테일한 생생함을 담아냈고, 캐나다 한국계 감독 셀린 송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도 지난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언론에서 손꼽히며 아카데미상 수상을 기대하게 한다. 박찬욱 감독의 드라마 ‘동조자’ 역시 A24 팬들의 대기 리스트 앞 순위에 들어가 있다.   기괴함과 기발함 그리고 다양성을 ‘유니크’함으로 만들어내며 밀레니얼 세대들을 예술 영화관으로 끌어내는 A24의 로고는 이제 팬들에게는 ‘품질인증’ 마크의 동의어로 여겨진다. 이 제작사는 지난해 10월 “앞으로 상업영화와 거대 IP 위주의 제작으로 전환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등장하며 일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팬들은 “거대 영화도 만들고 작은 예술 영화도 만드는 HBO처럼 변신하면 된다”고 변호하고 있다. 독립영화 최후의 보루인 이 회사가 똑똑한 다윗에서 돈만 탐내는 골리앗으로 변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2024.01.12 00:28

  • 갠지스 강물 먹방에 '대상84' 됐다…기안84의 성장드라마 [이윤정의 판&펀]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기안84처럼 달리고 기안84처럼 여행하고 싶다. TV를 보며 문득 든 생각에 나도 살짝 놀랐다. 호감과 비호감의 경계를 넘나들던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은근한 동경의 대상이 되다니.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3개국 시리즈와 ‘나 혼자 산다’ 마라톤 도전을 계기로 기안84는 보는 이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예술가의 감성과 충동으로만 가득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뚝심과 끈기의 사나이였다. 대도시 서울에서 다소 ‘기인’처럼 여겨지던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바깥세상으로 향하자 날개가 되어주었다. 그는 세상의 낯선 문화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작은 깨달음마저 주고 있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기안84는 수년간 TV 예능프로그램이 만든 가장 성공한 캐릭터다. ‘대세84’ ‘대상84’가 요즘 그의 별명이다.     ■  「 세계 일주 프로그램 속 신선함 낯선 문화도 자연스럽게 즐겨 그와 함께 시청자도 성장해가 」    판앤펀 마다가스카르에서 현지 사람들과 바다낚시를 한 기안84는 당연히 물고기를 구워 먹으려는 그들을 말리고 굳이 모래 묻은 손으로 생선 살을 발라내 초장과 함께 들이민다. 생전 처음 접하는 음식 문화에 기겁하는 그들의 표정. 세상 누구에게나 익숙하지 않은 타인의 문화는 낯설고 어렵다. 보통 사람의 여행이 그들의 낯선 문화에 놀라고 힘겹게 그들의 음식을 맛보는 것인데, 그는 여행객으로서 현지인을 놀라게 한다.   이런 장면은 그들이나 나나 각자 기이한 문화의 소유자라는 걸 즉석에서 증명한다. 결국 함께 먹고 웃음 지으며 그는 현지인과 급속히 친해진다. ‘현지 적응’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현지인에게 우리 문화를 ‘강제 전파’하고, 구경하러 여행 가서 자신을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반전이 웃음의 포인트를 만들어낸다. 그의 여행 예능이 남달라지는 지점이다.   어쩐지 아슬아슬해 보이는 그의 여행 속 기행은 갠지스강에서 수영하고 더러운 강물을 떠먹고 피라냐가 헤엄치는 아마존 강물에 뛰어들고 우유니 사막의 소금으로 이를 닦고, 입속에 넣었던 반죽으로 만든 현지 전통 음료도 들이켜는 등 끝이 없다. 분명 누구에게나 추천할만한 여행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인도와 내가 하나 되고 싶다”고 외쳤던 그는 최선을 다해서 여행지의 맥락 속으로 과감히 뛰어든다. 자신의 ‘컴포트 존’에서 완벽히 탈출해 불안하지만 새로운 공동체의 일상에 집중적으로 참여한다. 허물없이 말을 걸고 그들의 집을 찾아가고 결혼식과 파티에서 함께 먹고 춤춘다. 그들과 똑같이 무릎을 꿇고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어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린다.   그러면서 빨리 그들과 친구가 된다. 편견 없이 내부자의 시선을 가지려 노력하고, 짧지만 진하게 일상으로 들어가 이물감 없이 녹아드는 그의 여행은 ‘인류학적’이라고 할만하다. 그는 멋진 곳과 맛집을 찾아 남들과 같아지려고 애썼던 나의 여행을 돌아보게 한다. “진정한 발견의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그걸 볼 때 이뤄진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이다. 확실히 그의 여행은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때 생겨나는 새로운 기쁨을 제시한다.   가장 성공한 캐릭터 기안84는 더 정확히 말하면 가장 성장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7년 전쯤 그가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그는 깔끔함과는 거리가 멀고 눈치 없어 보이고 철없고 좌충우돌하는 존재로 보였다. 시멘트 바닥의 자췻집과 사무실 바닥에서 잠을 자는 그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캐릭터로 신선함을 안겨주면서도 왠지 불안 불안한 모습이었다. “재미는 있지만 저런 사람이 가까이에 있는 남자친구라고 생각해보세요”가 그에게 늘 달리는 댓글이었다.   그가 웹툰에 보인 사회적 약자나 여성에 대한 시각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약자에 대한 ‘편견’을 의심받았던 그는 지금은 낯선 문화와 사람에 대한 ‘편견’ 없는 진심으로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여행을 통해 더욱 내면을 발전시키는 그를 기대한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몇 년 전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할 때만 해도 방송은 그의 행동을 손쉽게 웃음거리로 몰아가거나 공격하는 모습이어서 불편했다. 심지어 한 회에서는 출연자들로부터 따돌림당했다는 의심이 나오기도 했다.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에서는 그의 기행이 이어지지만 패널들이 비웃거나 놀리지 않고 감싸주는 분위기라 보기에 더 편하다. 흥미롭지만 낯선 사람인 듯 그를 ‘구경’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 그의 특이함에서 매력을 발견하는 시선으로 바뀌었다고 하겠다.   “대상을 받는 게 무섭기도 하다. 근데 받아도 똑같이 살 것 같다”라고 그는 며칠 전 말했다. 그의 성장드라마를 함께 보아온 이들이 바라는 점도 같을 것이다. ‘대세84’ ‘대상84’가 되더라도 여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돌처럼 낯선 세상과 부딪히기. 버킷리스트를 다 실현한 뒤에도 또 철없는 여행을 하며 끝없이 성장하기.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2023.12.08 00:11

  • 수퍼스타 이효리의 변신…'후디에 반바지'에 팬들 당황한 까닭 [이윤정의 판&펀]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영화 ‘똥개’(2003)는 배우 정우성의 변신으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데뷔작 ‘비트’와 ‘태양은 없다’ 등에서 아름다운 용모로 세상을 놀라게 한 그는 여기서 지저분한 얼굴의 동네 청년으로 변했다.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 “미남 정우성을 연기자 정우성으로 보게 한 영화”라는 게 관객의 중론이었다. 그의 파격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팬으로서 마음 한구석에는 영화가 그의 잘생긴 얼굴을 1초도 보여주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미남’으로만 소비되고 싶지 않은 배우가 보여주고 싶은 점을 알면서도, 팬으로서도 스타에게 꼭 보고 싶은 모습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  「 6년 만의 신곡으로 ‘가수’ 확인 화려한 댄스보다 ‘성숙’에 무게 그래도 예전 카리스마 그리워 」    판&펀 이번 달 개봉을 앞둔 영화 ‘서울의 봄’ 예고 포스터에서 군인이 된 정우성은 50대에도 여전히 얼굴만으로 시선을 끈다. 팬들은 그가 아주 늙어버리기 전까지는 자신의 미모를 ‘남용’해도 기꺼이 용서할 듯하다.   이효리가 최근 6년 만에 낸 디지털 싱글 ‘후디에 반바지’에서는 자신이 지금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깊이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20대 내내 당대의 트렌드를 이끈 수퍼스타답게 힙합을 베이스로 한 로파이(Lo-Fi) 이지리스닝으로 최근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30대 정신적 성숙기를 거친 40대의 그답게 화려함과 강렬함으로 애써 승부하기 보다는 느슨한 패션과 리듬으로 여유를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타인의 장단에 맞추지 않고 내가 무얼 걸치든, 어디에 서 있든, 난 더 우아하게 나만의 레드카펫을 걷는다’라는 젊은 시절 당당한 메시지는 그대로 내세웠다. 노래는 편안하고 쉽게 들려 전체적으로 나쁘지는 않다. 어쨌든 이름만으로 거대한 브랜드인 그가 ‘가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신곡으로 도전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문제는 이효리의 팬들이 그에게 보고 싶어 하는 지점과의 차이다. 이번 노래를 놓고 “내가 이효리에게 바란 건 그게 아닌데” 같은 아쉬운 반응이 눈에 많이 띈다. 20여 년 전 데뷔 때부터의 영상들에 언제나 “2023년 지금 이대로 나와도 인기를 휩쓸 거다”라는 확신의 댓글로 도배했던 팬들이었다.   이효리는 “K팝이란 용어가 있기도 전에 이렇게 힙한 패션을 선도한 자가 있었다”고 자랑하고픈 수퍼스타였다. 등장만 해도 무대가 환해지고 화려한 카리스마에 압도당하는 순간을 기억하던 이들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후디와 반바지 차림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변신하려는 노력은 스타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자세다. 언제까지 과거의 이미지만 재탕하며 머물러 있을 순 없다. 그는 정재형과의 유튜브 영상에서 “트렌드에 뒤처져 있지 않으면서, 내가 가진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고” 그러면서도 “뭔가 새로운 모습을 제시하고 싶다”는 고민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이번 싱글을 보면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수퍼스타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에 눌려 있어 보인다. 성숙함을 드러내려 화려한 리듬과 댄스의 힘을 빼고,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며 낯선 패션을 보이고, ‘나다운 것’을 벗어날 필요가 없다는 듯 아주 좁은 음역대로만 노래한다. 너무 많은 생각을 담으려다 딱히 새롭지도 딱히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 어정쩡한 결과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팬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이효리만의 독보적인 멋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   지금 이효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 나이에 새로운 뭔가를 보여줄 수 있을까”보다는 “내가 정말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고민하는 일인 것 같다. 성시경이 발라드가 한물간 이 시대에도 “이게 너무 좋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라서” 다시 발라드곡을 들고나와 환영받는 최근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거기서 출발해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그게 진짜 그에게 바라는 변신이다.   성장이라니, 데뷔 26년차 40대의 수퍼스타에게?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다는 건 완성되지 않은 자신을 인정하는 일이다. 성장할 여지가 남아 있음을 알고 그것을 개발하는 것이다. 얼마 전 그는 보컬학원에 등록해 발성부터 배우고 있다고 밝혔는데, 그런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게 이효리답다.   나이가 들었으니 이건 자제해야 하고, 트렌드를 따르기 위해 저건 해야 한다며 눈치 보는 건 팬들이 보고 싶은 모습이 아니다. 나이 따위, 수퍼스타로서의 부담 따위 벗어던지고 과감하고 발랄하게 자신의 한계를 넓히는 모습을 보고 싶다. 팬들은 새로운 트렌드에 환호하기도 하지만 스타가 환기해주는 추억에 열광하고 싶기도 하다. 변신이라는 개념에 얽매여 애써 이런 점을 외면할 필요도 없다. 팬들이 보고 싶어 하는 점과 내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점을 맞추며 40대에 새 유행을 만들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수퍼스타 이효리 정도라면 도전해볼 만한 과제다.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2023.11.03 00:35

  • [이윤정의 판&펀] 진화하는 K팝, ‘K’의 정체는…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 “그러니까, K팝이란 게 뭐였지?” 뉴진스의 곡들을 들으며 새삼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 영국 옥스퍼드 사전의 정의는 간단했다. ‘한국의 팝음악(pop music from South Korea).’ 그런데 요즘의 K팝에서 한국이라는 국적은 큰 의미가 사라졌다. 외국 가수들이 참가한 그룹은 셀 수없이 많아졌고 JYP 박진영은 아예 북미의 K팝그룹을 만들겠다며 오디션을 치르고 있다.   그렇다면 K팝은 하나의 음악 장르인걸까. 라틴팝 같이 지역 전통음악을 베이스로 한 음악과 비교해볼 때 혼성장르의 성격을 띤 K팝을 별도의 팝 하위 장르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러니 정색하고 K팝의 정의를 말하자면 설명이 길어진다. 그래도 우리는 모두 안다. K팝이 어떤 느낌인지.     ■  「 세대·지역 연결한 뉴진스 음악 미국 주류 팝을 이끌어갈 수도 한국 대중음악 새로 돌아봐야 」    인기 절정의 걸그룹 뉴진스. K팝의 새로운 진화를 보여준다. [연합뉴스] 뜬금없이 K팝의 정의를 생각해본 건 뉴진스가 그만큼 새로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K팝의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다. ‘여유로움’ ‘투명함’ ‘친근함’ ‘자연스러움’ ‘로우파이’ ‘미드텐션’…. 뉴진스를 리뷰할 때 외국의 음악 잡지들이 붙이는 말들이다. 강렬한 비트와 칼군무, 복잡한 코드 진행, 걸크러시 같은 강렬함과 자극이 대표적 이미지였던 것에 비하면 큰 변화다.   ‘피치포크’같은 음악전문지는 뉴진스의 미니앨범 ‘Get up(겟업)’에 역대 K팝 중 ‘서태지와 아이들 1집’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평점을 주었고 콧대 높은 마니아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어깨에 힘을 빼고도 이만큼 할 수 있어’라는 우쭐한 팬심이 솟구친다. 그뿐인가. 40~50대 중년들도 “내가 K팝을 잘 몰랐었는데”라며 애정 담긴 댓글을 달기 바쁘다. UK개러지, 저지클럽, 파벨라 펑크 등 다양한 요소를 가져와 대중적으로 포장했다는 그 음악적 비결을 몰라도, 살랑살랑하는 이 음악은 듣기에 즐겁고 쉬우면서도 세련되고 자꾸 듣고 싶어진다. 세대를 아우르고 대중과 전문가를, 한국과 세계를 아울렀다.   데뷔 1년도 되지 않아 빌보드 100 차트에 신곡들을 한꺼번에 올리고 데뷔 첫 콘서트를 미국 록 페스티벌 롤라팔루자에서 떼창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뮤지션은 미국에서도 찾기 힘들다. 이쯤 되면 이제 ‘빌보드 차트 진입’이라거나 ‘미국 진출’ ‘성공적 안착’ 같은 비주류의 자세는 불필요해 보인다. 이대로 쭉 간다면 이들은 역사적인 히트와 성공은 물론 앞으로 미국 팝 주류의 트렌드를 앞에서 선도하는 한 축이 될 것이다.   혁신적이지만 감정적으로 세밀하고 복고적이면서도 첨단의 느낌인 음악. K팝의 문법과 전형성을 탈피하며 보편성으로 나가는 K팝은 이렇게 음악적으로 넓어지고 진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진화하는 K팝의 ‘K’에 어떤 것이 더 담겨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권위 있는 음악전문지 ‘롤링스톤’은 지난달 ‘가장 위대한 코리안 팝뮤직 100선’을 발표했다. 이들은 ‘K팝’의 시작을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정의하면서도, 이것을 낳은 한국 가요사 전체를 대상으로 100곡을 선정했다. K팝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더 진지하고 깊어졌음을 실감케 한다.   우리로서는 오늘의 K팝 탄생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풍부한 결의 대중가요들을 만들어 왔는지를 새삼 자랑스럽게 되돌아보게 된다. K팝이 진화해나가며 K는 이런 폭넓은 한국의 대중음악까지 포함되는 의미로 확장되길 기대한다.   K팝의 K가 단순히 음악일 뿐 아니라 각종 트렌드를 엮어내는 고도의 음악적 기획력, 팬덤과 소셜미디어, 스토리텔링 전략, 또는 이들을 키워내는 훈련방식 등 통합적인 노하우와 시스템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이 또한 한 걸음 더 진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종종 발생하는 연습생 인권 문제, 불공정 계약 시비 같은 음악 외적인 분쟁이 진화하는 K팝의 과제를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K팝을 바라보는 외국 언론의 시선들은 K팝의 이미지에 시스템의 문제점을 계속 드러내려 한다. 그것에 대해 “너희들은 어떤데”라고 반문만 할 건 아닌 것 같다.   K팝의 K에 ‘나라를 대표하는’이라거나 ‘필요하면 국가적 행사에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같은 의미는 더 이상 담기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도 된다. K팝의 화려한 오늘을 만들어낸 이들은 K팝 군단의 일원이나 문화 수출의 역군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피땀 눈물을 흘린 아티스트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 

    2023.08.25 00:44

  • "이 멋진 걸 엄마 아빠만 봤다니"…54세 김완선에 빠진 MZ 왜 [이윤정의 판&펀]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 ‘MZ세대와 중장년의 세대갈등’ ‘무분별한 악플 세례’ 같은 사회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김완선(54)의 유튜브 동영상 댓글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tvN ‘댄스가수 유랑단’ 대학축제 공연을 계기로 젊은 세대의 관심이 폭발하며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이 가수에 “이렇게 대단한 분이었군요” “이 멋진 걸 엄마 아빠만 봤다니”라는 깨달음과 함께 ‘국보급 레전드’ ‘무대 천재 끝판왕’ 같은 극찬이 쏟아진다. 30년 넘게 그를 보아온 세대도 마찬가지. 초등학교 때부터 팬이었다며 ‘100년에 한 번 나올 전무후무의 댄싱퀸’을 알아본 자기 눈을 대견해 하거나 “그땐 제대로 몰라봐 미안하다”며 뒤늦은 애정을 고백한다. 악플 하나 없는 훈훈한 세대 통합의 현장이다.     ■  「 “이 멋진 걸 엄마 아빠만 봤다니” 이 시대 젊은이들 탄성 쏟아져   세대통합 이끄는 ‘리듬 속 그 춤’ 」    판 & 펀 그럴 만도 하다. 김완선의 춤을 보면 대가들이 흔히 그렇듯 ‘자유’나 ‘초월’이란 말이 떠오른다. 칼군무, 포인트 안무 혹은 팝핀, 브레이크 댄스, 웨이브…. 아이돌이나 댄스 가수들이 애써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을 이 사람은 훌쩍 뛰어넘는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듯 자유롭게, 힘들이지 않고 손끝 하나 고갯짓 하나로 독보적인 선을 만들어낸다. 팬들이 으뜸으로 꼽는 1987년 아시아 가요대전 팩스뮤지카 무대, ‘리듬 속에 그 춤을’ 공연에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다니는 그는 흡사 한 마리 나비 같다. 물려받은 유전자가 남다르기 때문일까. ‘한국 근대무용의 아버지’ 한성준(1874~1941), 승무·살풀이춤 대가 한영숙(1920~1989)의 후손인 그는 시쳇말로 로열패밀리에서 태어난 ‘금수저’ 춤꾼이다.   그러나 이런 찬사는 그의 춤이 재발견되면서 쌓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선구자들이 흔히 그렇듯 김완선은 처음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무려 38년차 가수 김완선의 1986년 데뷔 기사는 ‘기대되는 율동 가수’ 혹은 율동이 돋보이는 ‘비디오형 가수’라 쓰고 있다. ‘댄스 가수’ ‘댄스 음악’이란 말을 아직 안 쓰던 시절이었다. ‘비디오형’이라는 말에는 ‘오디오형 가수’보다 한끝 아래라는 폄하가 은근히 담겨있다. 춤곡이라면 여가수들이 간간이 발표하는 빠른 리듬에 약간의 율동을 곁들인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아이돌 댄스 가수의 원형이라 할 박남정이나 소방차보다 한두 해 앞선 데뷔였다.   온몸을 젖히는 웨이브와 목이 꺾일 듯한 헤드뱅잉, 앞발을 번쩍 치켜드는 동작 등 격렬한 춤을 추는 가수의 등장. 17세 소녀의 도발은 수십 년 군사독재 시대 대중문화에 어쩔 수 없이 깔려있던 근엄한 공기에 혁명적인 파열음을 냈다. 하지만 처음 보는 그 몸짓은 낯설었다. 대중은 ‘어떻게 저렇게 춤을 잘 출 수 있을까’ 넋을 잃고 빨려들면서도 ‘저렇게 춤을 춰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과 거리낌이 앞섰다. 지금 같으면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으로 칭송받을 그의 치켜뜬 눈은 늘 놀림거리였다. 1991년 ‘가요톱10’ 1위로 주류의 인정을 받기까지는 데뷔 후 5년이 걸렸다. 그것도 댄스곡이 아닌 발라드 ‘혼자만의 것’과 시티팝 ‘삐에로는 나를 보고 웃지’였다. 오늘날 명곡으로 꼽히는 ‘리듬 속에 그 춤을’은 물론 ‘오늘밤’ ‘나 홀로 뜰앞에서’는 하나도 1위를 못했다. 팬들이 “너무 빨리 태어났다”고 아쉬워하는 김완선은 이제야 시대와 제대로 된 접점을 찾은 듯하다.   반가운 건 그와 시대의 화해뿐만 아니다. 김완선은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등에서 거듭되는 성공에도 “마치 남의 일 하듯 했고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시대를 앞서가는 기획력과 오늘날 아이돌 훈련 같은 방식으로 김완선을 스타로 만들어낸 매니저 이모였지만 그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줬기 때문이다. 제대로 먹지도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칭찬 한 번 못 듣고 돈도 받지 못하며 하기 싫은 노래와 춤을 추다가 도망치듯 나왔다고 했다. 그는 오랫동안 주눅 든 채 자신과 불화하고 주변에 마음을 닫고 살아온 듯했다. 아직도 종종 이슈로 등장하는 연습생 인권이나 수익 정산 문제 같은 것을 훨씬 더 앞서 호되게 겪은 것이다. 오랜 시간 뒤 그가 직접 쓴 ‘Here I am’(2019)에서 ‘이젠 웃지 않아도 돼, 입술에 힘을 뺀 너의 모습 괜찮아’라고 하는 모습에 마음이 짠해지는 이유다. ‘댄스가수 유랑단’ 최근 방송에선 “아주 오랜만에 춤과 노래가 너무 하고 싶어 설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며 행복해했다.   열일곱 나이부터 ‘최초의 백댄서’ ‘최초의 본격 댄스가수’ ‘최초의 여성 밀리언셀러’ 같은 역사를 써온 김완선. 그는 이제 ‘가장 오랫동안 현역 댄스가수로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라는 새 역사를 쓸 일만 남았다. 자유롭고 행복해진 자신을 더 자랑스러워하는 개인의 역사도 함께 쓰면 좋겠다.   이윤정 문화 칼럼니스트 

    2023.07.21 00:48